"아저씨, 나랑 여행 갈래요?"
어두운 중고 책방 안. 소담이 제문에게 묻는다.
소담은 교복을 입고 책방에 들어온 스물한 살의 젊은 여자,
책방 주인인 중년 남자 제문은 눈을 감고 누워 자는 것처럼 보인다.
"안 자는 거 다 아는 데..."
"꺼져."
"일본 후쿠오카 알죠? 거기 어때요?"
"이거 진짜 또라이네."
시작은 장률의 영화로부터
장률의 영화 〈후쿠오카〉의 첫 장면. 둘은 후쿠오카로 떠난다. 그리고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해효를 만나 유령과도 같은 첫사랑의 기억과 자취를 더듬어가며 후쿠오카를 떠다닌다. 헛헛하기 그지없는 이들의 행보를 받아들이는 후쿠오카는 어쩐지 이방인들에게도 문턱이 낮고 헐거운 곳으로 보인다.
장률의 영화 〈후쿠오카〉
5월의 4박 5일 여행지로 후쿠오카를 선택한 데는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이 3할 정도 영향을 끼쳤다. 문턱 낮고 헐거우며 동선 짜기 부담이 덜한 곳. 한국과 닮은 듯한 고풍스러운 정취와 이국에서 쌓아올리는 추억, 그 두 가지를 모두 취할 수 있는 곳.
실제로 후쿠오카는 일본 여행 초심자를 위한 도시로 알려졌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일본 대도시이고 온천을 비롯한 아기자기한 주변 관광지도 많아 짧은 일정에도 여행의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상수동의 하카타에서 맛의 퀀텀 점프
후쿠오카의 시내 동선은 하카타(博多)와 텐진(天神)을 거점으로 시작한다. 이 두 곳은 교통의 허브이면서 무수히 많은 맛집과 카페, 쇼핑센터를 품고 있다. 들리는 대화들, 손에 들린 쇼핑백들, 잘 알려진 맛집마다 늘어선 긴 줄, 그 거리를 좁히는 잰걸음. 거리에서 마주치는 열 명 중 네다섯 명은 한국인이 아닐까, 이국이라는 이질감도 덜하다. 실제로 후쿠오카 외국 여행자의 50% 이상이 한국인이라는 통계가 있다. 여행지에서도 무언가와 경쟁하는 듯한 동포의 익숙한 양태가 여행 내내 함께했다.
하카타역 인근 숙소에 짐을 풀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진하고 꼬릿한 돼지 육수의 냄새가 오후 거리에 퍼져 있다. 돈코츠 라멘을 파는 식당들의 솥에서 끓고 있는 진득한 육수의 내음이다. ‘그래, 이곳이 본고장이었지!’ 이치란 라멘을 위시로 하카타와 텐진에는 라멘 맛집들이 즐비하다. 십 년 전쯤, 서울 상수동에 ‘하카타’라는 지명을 노렌(暖簾)으로 내건 식당의 돈코츠 라멘을 탐닉하여 긴 대기 줄도 감수하고 자주 찾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작 하카타에서 맛본 라멘은 상수동에서 한때 독점적으로 재미를 봤던 자칭 ‘오리지널’의 그 맛에서 가히 퀀텀 점프한 수준이었다.

일본 음식 맛의 퀀텀 점프는 계속 이어졌다. 돈코츠 라멘과 함께 이른바 후쿠오카 3대 명물로 알려진 모츠나베(곱창전골)와 미즈타키(닭고기전골)는 물론, 명란(멘타이), 우동과 소바, 돈카츠, 각종 튀김과 덮밥, 오코노미야키, 가정식은 체류 일정 중 그 어느 하나 쉽게 거를 수 없는 야구 강팀 타선 같았다. 여기에 매끼 곁들였던 생맥주까지. 주량이 약해도 찾게 되는 맥주를 목안으로 넘기면서 수트와 브리프케이스 차림이 한 몸 같은 일본 회사원들의 퇴근 맥주 첫 잔의 카타르시스를 유사 경험해 본다.



나카스 강변을 걷는 오후 산책의 정취
하카타와 텐진 사이에는 작은 폭의 나카강이 흐른다. 하카타의 대형 쇼핑몰 캐널시티와 텐진 중앙공원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이 나카스(中洲)인데, 이곳은 규슈 지역 최대 환락가이자, 도쿄의 가부키초, 삿포로의 스스키노와 함께 일본 3대 환락가로 꼽히는 곳이다. 특히 하카타 쪽에 접한 강변은 밤이 되면 포장마차(야타이)가 성시를 이룬다.
하카타 위쪽의 몇몇 신사들을 거쳐 수백 미터 이어지는 전통의 카와바타 상점가에서 충분히 아이쇼핑을 한 후 다시 하카타강을 끼고 올라오면 나카강이 나타난다. 그리고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나카스로 들어오게 되는데, 밤의 환락을 위해 휴식이라도 취하고 있는 듯한 조용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낮에 이쪽 지역을 걷자니 ‘그래, 내가 일본에 왔지!’ 하는 각별한 정취가 느껴진다.


유유히 흐르는 짙은 빛의 나카강과 강변의 건물들, 그 옆에 크게 걸린 맥주와 탈모방지제, 부동산, 보험 광고 빌보드가 외지인에게 어떤 노스탤지어를 전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렸던 미래의 일본 도시나 〈블랙 레인〉에서 재현된 1989년 판 일본 도시보다 한참 더 과거로 접어든 레트로 풍경이다. 야쿠자나 레플리칸트가 사는 판타지가 아닌, 푸근하고 평범한 사람이 사는 여느 중소도시의 정경이다.


나카스에서
:: 더 가까운 일본, 후쿠오카 소요기 #2 읽기
글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
"아저씨, 나랑 여행 갈래요?"
어두운 중고 책방 안. 소담이 제문에게 묻는다.
소담은 교복을 입고 책방에 들어온 스물한 살의 젊은 여자,
책방 주인인 중년 남자 제문은 눈을 감고 누워 자는 것처럼 보인다.
"안 자는 거 다 아는 데..."
"꺼져."
"일본 후쿠오카 알죠? 거기 어때요?"
"이거 진짜 또라이네."
시작은 장률의 영화로부터
장률의 영화 〈후쿠오카〉의 첫 장면. 둘은 후쿠오카로 떠난다. 그리고 작은 술집을 운영하는 해효를 만나 유령과도 같은 첫사랑의 기억과 자취를 더듬어가며 후쿠오카를 떠다닌다. 헛헛하기 그지없는 이들의 행보를 받아들이는 후쿠오카는 어쩐지 이방인들에게도 문턱이 낮고 헐거운 곳으로 보인다.
5월의 4박 5일 여행지로 후쿠오카를 선택한 데는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이 3할 정도 영향을 끼쳤다. 문턱 낮고 헐거우며 동선 짜기 부담이 덜한 곳. 한국과 닮은 듯한 고풍스러운 정취와 이국에서 쌓아올리는 추억, 그 두 가지를 모두 취할 수 있는 곳.
실제로 후쿠오카는 일본 여행 초심자를 위한 도시로 알려졌다. 한국과 가장 가까운 일본 대도시이고 온천을 비롯한 아기자기한 주변 관광지도 많아 짧은 일정에도 여행의 재미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상수동의 하카타에서 맛의 퀀텀 점프
후쿠오카의 시내 동선은 하카타(博多)와 텐진(天神)을 거점으로 시작한다. 이 두 곳은 교통의 허브이면서 무수히 많은 맛집과 카페, 쇼핑센터를 품고 있다. 들리는 대화들, 손에 들린 쇼핑백들, 잘 알려진 맛집마다 늘어선 긴 줄, 그 거리를 좁히는 잰걸음. 거리에서 마주치는 열 명 중 네다섯 명은 한국인이 아닐까, 이국이라는 이질감도 덜하다. 실제로 후쿠오카 외국 여행자의 50% 이상이 한국인이라는 통계가 있다. 여행지에서도 무언가와 경쟁하는 듯한 동포의 익숙한 양태가 여행 내내 함께했다.
하카타역 인근 숙소에 짐을 풀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진하고 꼬릿한 돼지 육수의 냄새가 오후 거리에 퍼져 있다. 돈코츠 라멘을 파는 식당들의 솥에서 끓고 있는 진득한 육수의 내음이다. ‘그래, 이곳이 본고장이었지!’ 이치란 라멘을 위시로 하카타와 텐진에는 라멘 맛집들이 즐비하다. 십 년 전쯤, 서울 상수동에 ‘하카타’라는 지명을 노렌(暖簾)으로 내건 식당의 돈코츠 라멘을 탐닉하여 긴 대기 줄도 감수하고 자주 찾아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작 하카타에서 맛본 라멘은 상수동에서 한때 독점적으로 재미를 봤던 자칭 ‘오리지널’의 그 맛에서 가히 퀀텀 점프한 수준이었다.
일본 음식 맛의 퀀텀 점프는 계속 이어졌다. 돈코츠 라멘과 함께 이른바 후쿠오카 3대 명물로 알려진 모츠나베(곱창전골)와 미즈타키(닭고기전골)는 물론, 명란(멘타이), 우동과 소바, 돈카츠, 각종 튀김과 덮밥, 오코노미야키, 가정식은 체류 일정 중 그 어느 하나 쉽게 거를 수 없는 야구 강팀 타선 같았다. 여기에 매끼 곁들였던 생맥주까지. 주량이 약해도 찾게 되는 맥주를 목안으로 넘기면서 수트와 브리프케이스 차림이 한 몸 같은 일본 회사원들의 퇴근 맥주 첫 잔의 카타르시스를 유사 경험해 본다.
나카스 강변을 걷는 오후 산책의 정취
하카타와 텐진 사이에는 작은 폭의 나카강이 흐른다. 하카타의 대형 쇼핑몰 캐널시티와 텐진 중앙공원 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이 나카스(中洲)인데, 이곳은 규슈 지역 최대 환락가이자, 도쿄의 가부키초, 삿포로의 스스키노와 함께 일본 3대 환락가로 꼽히는 곳이다. 특히 하카타 쪽에 접한 강변은 밤이 되면 포장마차(야타이)가 성시를 이룬다.
하카타 위쪽의 몇몇 신사들을 거쳐 수백 미터 이어지는 전통의 카와바타 상점가에서 충분히 아이쇼핑을 한 후 다시 하카타강을 끼고 올라오면 나카강이 나타난다. 그리고 조그만 다리를 건너면 나카스로 들어오게 되는데, 밤의 환락을 위해 휴식이라도 취하고 있는 듯한 조용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낮에 이쪽 지역을 걷자니 ‘그래, 내가 일본에 왔지!’ 하는 각별한 정취가 느껴진다.
유유히 흐르는 짙은 빛의 나카강과 강변의 건물들, 그 옆에 크게 걸린 맥주와 탈모방지제, 부동산, 보험 광고 빌보드가 외지인에게 어떤 노스탤지어를 전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렸던 미래의 일본 도시나 〈블랙 레인〉에서 재현된 1989년 판 일본 도시보다 한참 더 과거로 접어든 레트로 풍경이다. 야쿠자나 레플리칸트가 사는 판타지가 아닌, 푸근하고 평범한 사람이 사는 여느 중소도시의 정경이다.
:: 더 가까운 일본, 후쿠오카 소요기 #2 읽기
글 백영훈
1990년대의 팝과 록에 어지러이 매혹당하며, 장래 희망으로 FM 라디오 DJ를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어렸을 적 바람과는 달리 글로벌 IT기업에서 25년 이상 일을 해오고 있다. 전업의 시간 이편에서는 팝을 비롯한 대중문화 딜레탕트로서의 삶을 즐기며, 여전히 팝 키드로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음악을 입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