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한 끼][푸드에세이] 장마엔 수제비

2022-07-04

진실한 한 끼 #10 
Web Edition. 외근과 점심 (5)


 

장마 1부가 끝나고 장마 2부가 시작되려 합니다. 이미 일기예보에서 ‘비비비비비 해해해 비비비비비’를 확인했던지라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34도를 웃도는 화창한 날씨와는 한 주 정도 재이별을 해야겠네요. 어느 일간지에서 이런 기사 제목을 뽑았더라고요. “장마가 좋아? 폭염이 좋아?” 아,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데요.


벌써 이렇게 뜨겁나, 좀 살살하지 싶던 6월의 절반은 인터뷰로, 나머지 절반은 책 제작으로 보냈습니다. 그 말인즉슨 최근에 외근 나갈 일이 없었다는 것이죠. 아니, 인쇄소에 감리를 보러 가기도 했으니 외근은 있었으나 스케쥴 상 점심 먹을 일은 없었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진실한 한 끼: 외근과 점심’을 써야 하는데… 혼자 되지도 않는 걱정이나 했고요.



최근 며칠간은 오랜만에 책 내지를 디자인했습니다. 제가 디자이너가 아니라 이게 참 한 번 시작하면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드는 작업인데요, 첫 번째 교정지를 만들고 한숨 돌릴 만하자 자발적 외근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 동네 사진 몇 장 찍고 밥이나 먹고 들어오자는 것이었지요. 하늘도 꾸물꾸물하니 수제비가 어떨까 하고요.


이렇게 맑은 날은 잠시 안녕


삼청동에 ‘삼청동 수제비’가 있다면, 사무실 가까운 서촌에는 ‘체부동 수제비와 보리밥’이 있습니다. 둘 다 좋아하는 곳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체부동 수제비를 더 좋아합니다. 예전에 사장님께 언뜻 들었던 바로는 여기선 멸치 육수를 쓰지 않는다고 하세요. 수제비 하면 자연스레 멸치 장국이 떠오르는데 신기한 일이지요. 이젠 멸치 육수를 잘 먹지만 그래도 이곳 수제비 국물은 특별합니다. 그 담백한 맛을 이 글 앞에 앉아 계신 분들께 떠먹여 드리고 싶네요. 수제비 피도 아주 야들야들하고요, 감자도 딱 알맞게 익고요, 무엇보다 열무김치가 정말…. 이번에 가서 보니 열무김치 1kg을 만오천 원에 팔고 있었습니다. 예전보다 조금 오른 거 같긴 한데 그래도 참 (학술지 디자인에 몰입했다가 빠져나오느라 하는 말이지만) resonable한 가격이라고 확신한다면, 여기 열무김치의 맛이 상상이 되실까요? 



여름이면, 특히 비가 오면 먹어야 할 것 같은 음식에 왜 수제비가 있는진 모르겠습니다. 예부터 수제비 같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 혹은 메밀 같은 밀 대체 음식들은 주로 여름에 많이 먹었습니다. 물론 조선 시대까지도 밀이 귀했으니 고급 음식이었겠지요. 요즘 복날에 삼계탕을 먹듯 당시엔 수제비를 먹었고. 한여름인 음력 칠석에도 밀전병과 수제비를 비롯한 밀가루 요리를 먹었다고 해요. (물론 칠석날이니 비가 내렸겠지요!) 『본초강목』과 『동의보감』에 따르면 밀이 몸을 차갑게 하는 음식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뜨거운 수제비를 먹는다고 이 맹렬한 더위 혹은 꿉꿉함을 이겨낼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선조의 지혜를 DNA로, 혹은 밈으로 물려받은 거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솔직히 수제비 자체를 즐겨 먹지는 않습니다. 체부동 수제비나 삼청동 수제비에 자꾸 가게 되는 이유는 두 곳 수제비가 너무 맛있어서 입니다. 어떤 음식에 기호가 없었는데 그 음식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곳에서 먹는 바람에 기호가 생겨 버린 경우랄까요. 저한텐 콩국수가 또 그런 음식입니다. 그러니까 서소문 진주회관에 가시면 말이죠… 아, 이미 드셔보셨다고요? 


 

청와대 개방 이후 사람이 훨씬 더 많아진 서촌이지만, 장마와 장마의 인터루드인 오늘은 햇볕과 습도가 공존하는 더위만 골목에 꽉 차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을 한 시간 넘게 피해서 간 덕에 혼자서도 마음 편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요. 여기선 수제비를 주문하면 또 다른 대표 메뉴인 보리밥을 맛보기 용으로 한 그릇 내어줍니다. 거기에 열무를 올리고 고추장을 넣어 비벼 먹지요. 이걸 아꼈다가 수제비와 함께 먹어도 좋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런 거 없으니까 삽시간에 빈 양은그릇만 긁적긁적하지요. 나머지 시간에는 이건 먹는 게 버는 거다, 열무김치를 하나하나 줄기차게 씹어 먹습니다.



음식을 기다리는 데 연배가 있는 분들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어렸을 적 수제비를 너무 많이 먹어서 몇 년 동안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요. 『진실한 한 끼』를 쓰며 (챕터에 넣진 않았지만) 수제비에 관해서도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았는데요, 거기서 항상 읽었던 이야기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전후의 세대 중 수제비를 싫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지긋지긋하게 먹은 건 둘째치고 가난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는 이유로요. 여기 수제비 집에 앉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고 서로 공감했을지 상상해 봅니다. 라면조차 수제비보다 비쌌던 시절, 마침내 그 시절과 화해하기로 한 오늘. 저는 그저 맛있어서 먹지만, 누군가는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수저로 얇은 밀가루 피를 뜨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오늘의 저는 여름, 장마와 화해하고자 수제비를 먹습니다. 올해부터는 여름을 좀 더 제대로 즐기자는 결심도 했거든요. 지난 2년보다 더 기쁘게 맞이하는 새로운 여름을 여러분은 어떻게 보내실 건가요? 저는 여전히 물 반 사람 반이라는 해수욕장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어떤 식으로든 이번 장마 2부를 곧 찾아올 한여름을 대비하는 시간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일단 남대문 시장 취재를 가던지 해서 서소문 갈 일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수제비도 먹었으니 다음엔 콩국수 한 그릇, 여름을 먹으면서 차근차근 시작해 보려고요.





글/사진 신태진

매거진 브릭스의 에디터. 『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을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www.instagram.com/ecrire_lire_vivre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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