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없이 시작한 빵 일기][베이킹에세이] 겁 없이 시작하는 빵 일기

2023-11-13

겁 없이 시작한 빵 일기 #1



빵 반죽을 만지는 것이 좋았다. 말랑하고, 부드럽고, 매끄러운. 반죽의 촉감은 고양이의 배 같았고, 갓 구운 빵의 모습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앉은 고양이와 같았다. 소란스러운 마음이 가라앉았다.


한겨울의 어느 날 처음 만난 시골빵 색 나의 고양이, 시드는 반려 인간의 크고 작은 방황을 모두 지켜보았다. 박사과정 입학허가와 비자까지 받아 놓고 밴드가 계속하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미국행을 포기하고, 최대한 활동에 영향을 받지 않을 듯한 직장에 취직했다. 일주일 중 생계유지 수단으로 무료한 일을 5일, 하고 싶은 일을 2일 할 수 있다면 기꺼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f71f795a25735.jpeg65e73463341fc.jpeg처음 구운 바게트, 처음 구운 식빵


출근길 ‘저 차에 치이면 적어도 몇 주는 출근 안 해도 될 텐데’ 생각이 들기 시작한 지 2년 후, 6년을 조금 못 채우고 퇴사했다. 아무리 평일은 로봇 직장인이 되기로 결심했어도 워라밸과 안정성만 보고 재미없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계속하는 것은 괴로웠다.


공공기관에서 나는 공대 출신의 본능을 거슬러 이미 정해진 답에 대한 근거를 만드는, 윗선의 관심 사항과 각종 이해관계를 챙기면서 기관의 책임 소재는 없도록 희석된 의미 없는 보고서를 찍어내는 타자기라고 느꼈다. 결국 보람조차 없는 이 일 대신 시간을 더 자유롭게 쓸 수 있고 스트레스를 덜 받으면서 월급도 쏠쏠한 좋은 직장을 찾아 이직을 할 수 있었을 리는 없고, 그런 조건을 충족하는 작은 서비스업 사업체를 새로 차렸다.


7650b04695741.jpeg8421af0df1e58.jpeg직접 구운 빵으로 만든 로즈마리 포카치아와 수제 햄버거


새로 시작한 일은 업무도 간단하고 근무 시간도 짧고 해외 공연 섭외에도 남은 연차 걱정 없이 응할 수 있었지만 업무가 쉽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분명 새로운 시도를 통해 배운 것도 누린 것도 많았으나 근본적으로 나의 발전에는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는 데드엔드 잡(Dead-end job).


아무런 기술도 필요 없는 단순한 돈벌이 수단인 점이 시간이 흐를수록 장점에서 큰 단점으로 바뀌어 갔다. 게다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내성적인 사람이 서비스업에 종사하려니 정신적 피로는 물론 인간 혐오와 분노가 쌓여만 갔다. 고객 응대 후 퇴근길에는 사람들의 소리도, 존재 자체도 견딜 수가 없어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방해금지 모드로 바꾸고 발랑 누워 오른쪽, 왼쪽 뒹굴며 반가워해 주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면 비로소 뱃속 깊이 휘몰아치던 부정적 감정이 잦아들었다.


66e59696dfadd.jpegd4e1cdeeb4a94.jpg4d1fad6c003f8.jpg스콘, 핫도그번, 얼그레이파운드케이크


출퇴근 이외에는 점점 집에서 은둔하려고만 드는 나의 건강을 염려하여 공기청정기를 장만해 준 남편은 수많은 사은품 중 작은 광파오븐을 골랐다. 안 그래도 좁은 주방에 오븐은 필요 없다던 나와, 있으면 무조건 잘 쓸 것이라 주장한 남편. 나보다도 더 나를 잘 알았는지, 나는 오븐이 도착하고 머지않아 첫 빵을 구웠다.


c5cc833bce76d.jpeg사워도우와 함께 하는 식사


빵을 구우면 무례한 사람들과 불편한 생각들을 잊을 수 있었다. 곱고 보송한 밀가루에 물이 고루 스며들도록 꼼꼼히 섞고, 이것 말고는 할 일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차분히 치대다 보면 곤죽 같은 반죽에 서서히 찰기와 매끄러움이 돈다. 뚜껑을 덮어 발효가 끝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준다. 하지만 거실 한쪽에서 낮잠 자는 고양이의 등을 참지 못하고 쓰다듬고 마는 것처럼 미처 발효가 끝나기 전에 뚜껑을 열어 동태를 살피기도 하고 반죽을 살살 만져 보기도 한다.


afde2ffddad14.jpg나의 발효종 솔라시도우 씨(와 그의 생일)


de970b315f920.jpeg오븐에 들어가기 전 발효 바구니에서 숙성되는 사워도우 반죽


때가 되면 동그랗게 반죽의 모양을 잡아 발효 바구니에 넣어 오븐에 들어갈 준비가 될 때까지 또 한 번 숙성을 거친다. 기다림의 연속인 일련의 과정은 집 밖에서의 혼돈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동화 속 한 장면처럼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마침내 오븐에서 나온 빵에서는 따스한 햇살에 황금빛으로 빛나는 나의 고양이와 같은 햇빛 냄새가 느껴지곤 했다. 밀가루, 소금, 물, 세 가지 재료가 폭신한 빵이 되는 과정은 마치 연금술같이 신비롭기도 했다.


a65789a131fce.jpegb0fb2d3a35fab.jpgc12eee7b347a0.jpg사워도우와 나의 시골빵 색 고양이 시드


번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 염증을 느끼던 내가 베이킹 중에서도 천연발효종을 직접 키워 사용하는 무척이나 느리고 까다로운 전통 방식에 마음이 끌린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천연발효빵 사워도우를 만들어 내는 나의 발효종 솔라시도우 씨와 함께 어느새 3년 차 방구석 베이커가 되었고, 과학적이며 미스테리한 옛 방식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 인터넷을 뒤지고 실험 노트도 써가며 점점 빵의 세계로 빠지게 되었다. 베이커리를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샌프란시스코로 짧은 유학을 떠나게 될 정도로 깊이.


9dca90cdf4cd6.jpeg월넛바나나 브레드




글/사진 조하영

c2abea9efc2a5.jpg메탈코어 밴드 ‘노이지’와 ‘데이 오브 모닝’의 베이스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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