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밥상][제철 음식] 가을의 끝자락, 무늬오징어를 먹으러 떠난 여행

2025-12-01


가을이 되면서 무늬오징어 먹으러 간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다. 제주는 육지보다 따뜻해 사시사철 무늬오징어가 잡힌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제철은 9월에서 11월. 문제는 무늬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지역도, 무늬오징어 잘하는 집들도 대부분 제주 서부 지역이라는 것. 그래 봤자 한 시간 반 정도 거리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야 할 거리다. 머릿속에서 무늬오징어가 초조하게 헤엄치는 와중 11월 달력까지 다 넘어가기 직전 가까스로 핑계가 생겼다. 사 놓고 한 번도 안 쓴 매트리스 깔판을 당근에 내놓았는데, 남원 신례리까지 가져다 줄 수 있냐는 부탁을 받은 거다. 이왕 그 동네까지 가는 거, 돈도 벌고 한 시간 더 달려서 무늬오징어를 먹으면 딱 좋은 그림이 나오겠다 싶었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무늬오징어를 좇는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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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오징어가 제철인 가을이라지만, 제주에서 이 시기에 진짜 제철을 맞이하는 건 귤이다. 몇 주 전만 해도 아직 초록빛이 돌던 과실들이 어느새 주황색으로 땡땡하게 여물어 멀리서 보면 크리스마스트리 같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도 한 달 앞. 그런데도 낮 기온이 21도까지 오르는 걸 보면, 한국에서 멸종 위기에 놓인 가을을 그나마 오래 즐길 수 있는 곳이 제주 아닌가 싶다.


게다가 남원이 어떤 곳인가. 감귤의 고장 아닌가. 평소엔 잘 안 가본 마을길로 접어드니 이곳도 저곳도 다 크리스마스트리였다. 유난히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남원은 언젠가 제주에서 거주 지역을 바꿔야 한다면 살아보고 싶은 동네다. 여기서 한눈에 보는 돌담, 귤나무, 한라산의 조화는 질리는 법이 없다. 제주 바다가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가장 제주다운 풍경은 이 각도에 있다.


왼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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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에서


당근을 하고 나서도 시간이 남았다. 며칠 전 보일러 가스가 떨어져 새 통으로 교체했는데 아저씨 인심으로 LPG 큰 통 반만큼은 될 귤이 따라왔다. 그러니 귤은 그만하면 됐고, 마침 레몬뮤지엄이 멀지 않았다. 제주에서 귤보다는 드물지만 그 이상으로 매력적인 과실. 여행할 때 한 번 와보고 이사 온 이후로는 처음이다. 이곳 레몬은 캘리포니아에서 온 레몬보다 비싸긴 하지만, 이게 레몬인지 오렌지인지 모를 크기를 손에 쥐는 순간 값이 아깝지 않다. 게다가 맛도 좋다. 평소에 먹을 일이 많지 않아도 사두면 이곳저곳 쓸 곳이 생기는 게 레몬이다. 생선구이에도 뿌리고, 레몬티나 레몬에이드를 만들어 마시고, 그래도 남으면 소주에 반 알 짜 넣으면 그만. 그냥 희석식 소주도 데낄라 못지않은 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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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

레몬뮤지엄의 컬러는 귤 못지않게 아름답다.


레몬뮤지엄은 은근히 볼거리도 많은데, 우선 2층 테라스에서 보는 한라산 뷰가 좋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푸른 기운을 덮은 한라산을 바라보며 레몬에이드 한 잔, 레몬 과육과 껍질을 넣은 레몬 스콘 한 덩이를 즐기면 여름 같으면서도 결국 완연한 가을인 이 계절이 상큼하게 채워진다. 또, 특이하게 레몬 비닐하우스 안에 칠면조와 공작을 키운다. 아이들이 굉장히 흥미로워하다가 결국 굉장히 겁을 집어 먹게 되는 포인트인데, 들어가 보시길, 어른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다. 특히 어디선가 갑자기 떼로 나타나 돌아나갈 길을 무심히 막아설 때는 조류가 공룡의 후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새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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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찾는 식당 ‘토끼트멍’은 산방산 근처에 있다. 모슬포 쪽 식당을 알아보다가 산방산 앞바다에서도 무늬오징어가 많이 잡히며, 여기가 무늬오징어 전문이라고 해서 예약한 곳이다. 가는 길에 어느덧 두터워진 구름 사이로 무슨 신앙처럼 빛이 쏟아져 내렸다. 계속 차를 멈출까 말까 고민하다가 산방산 보문사 앞에서 결국 정차를 하고 산 아래 사계리로 쏟아지는 햇살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 빛이 꼭 무늬오징어의 무늬를 닮았다…고 표현한다면 그건 좀 과몰입이려나.


사계리 빛내림


트멍은 ‘틈’이란 뜻의 제주어다. ‘토끼트멍’이란 식당 이름은 ‘토끼굴’ 정도 되는 의미일 텐데, 제주에서도 드문 무늬오징어 전문 식당이 왜 그런 이름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들어서면 무늬오징어를 안주 삼아 술을 진탕 먹고 나오게 되는 곳이라고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주인장께서 무늬오징어 낚시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시고, 무늬오징어로 해 먹으면 좋겠다고 알려진 회, 숙회, 물회, 무침, 버터구이를 ‘스페셜 메뉴’로 모두 즐길 수 있는 곳이라 유명하다. 무늬오징어 스페셜을 먹으려면 예약을 하는 게 좋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산방산 무늬오징어 전문 식당 토끼트멍


분위기는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산물 전문 식당과 살짝 거리가 있다. 차라리 실내 포차에 가까운데, 실제로 위스키와 하이볼까지 취급할 만큼 주류 구성이 다양하다. 하지만 하이볼은 아내에게 양보했다. 제주에 살며 업그레이드 된 점이 하나 있다면 회나 해산물을 술 없이도 먹을 수 있게 됐다는 거다. 아내는 이곳 하이볼이 지금까지 먹어본 하이볼 중 세 손가락 안에 든다고 평했다. 그러면 저는 다음 기회에.


메뉴까지 미리 예약한 만큼 기다림 없이 코스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입맛을 돋우라는 의미로 무늬오징어 물회가 나온다. 곧바로 몸통 회와 숙회, 데친 갈빗살과 다리, 뿔소라가 메인 접시에 깔린다. 드디어 제철에 너를 만나는구나. 회의 식감은 너무 흐물거리지도, 그렇다고 너무 쫄깃하지도 않은 중간쯤에 있는데, 입안에 착 감기는 쫀득함이 유독 도드라졌다. 조금 과장해서 빨판 같은 그 접착력이 사람들이 말하는 무늬오징어의 단맛 혹은 감칠맛을 끌어올리는 듯했다. 직원의 추천대로 초장이 아닌 기름장에 찍어 먹을 때 제 맛을 즐기기 좋았다. 숙회도 데침 정도가 아주 적절하여 질기지 않고 씹을 때마다 부드럽게 입안에서 사라져갔다. 회와 숙회 어느 쪽이 더 맛있게 느껴질지는 순전히 개인의 취향에 달려 있을 듯했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무늬오징어 코스


회와 숙회, 그리고 은근히 자꾸 손이 가는 뿔소라(따로 뿔소라만 팔기도 한다)를 먹다 보면 소면과 함께 버무린 무늬오징어 무침이 나온다. 해산물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탄수화물에 대한 갈망을 시워하게 긁어주는데, 소면은 숙회와 함께 먹으면 좋단다. 마지막으로는 약간 차가워진 위장에 기름칠을 해주는 버터구이. 그냥 버터만 넣은 게 아니라 단짠의 묘미를 살린 ‘요리’라 회를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쪽이 더 매력적일 것 같았다.


이쯤 되자 국물을 향한 갈망 또한 주체할 수가 없어 무늬오징어가 잔뜩 들어간 라면을 추가했다. 전복과 게, 미역이 들어간 라면은 짬봉같이 깊은 국물이라 배가 부르다고 모른 척했으면 아쉬울 뻔했다.


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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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타임이 시작되자마자 들어간 덕에 나올 때쯤엔 무늬오징어와 술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식당의 트멍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다. 다들 이 계절 가장 맛있는 걸 즐기러 왔구나. 한밤처럼 깜깜하지만 아직 이른 저녁이고, 이대로 집까지 먼 길을 가기엔 배가 너무 불러 바이나흐튼 크리스마스박물관에 들렀다.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귤나무를 보다 보니 진짜 크리스마스트리가 보고 싶었다. 이곳도 며칠 전 시작한 크리스마스마켓 때문에 북새통이었지만, 조명에 물든 사람들의 얼굴은 밝기만 했다. 낮에는 따스하더니 밤에는 겨울을 예감하게 되는 11월의 마지막. 무늬오징어도, 귤도, 한 달 남은 크리스마스도 모두 제철인 제주의 시간이다.


바이나흐튼 크리스마스박물관




글·사진 | 신태진

브릭스 매거진의 에디터. 『진실한 한 끼』『꽃 파르페 물고기 그리고 당신』를 냈고, 『홍콩단편, 어쩌면 익숙한 하루』를 함께 썼다.
https://litt.ly/ecrire_lire_vi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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