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날, 동지입니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지요. 오늘 밤만 잘 넘기면 하지까지는 해가 길어질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동지를 새로운 시작, ‘작은 설날’이라 부르며 중요한 날로 여겼다고 하네요. 물론 밤이 긴 날인 만큼 요사스러운 기운을 막아줘야 하기도 했고요.
팥은 역병을 퍼트리는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음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짓날에는 액막이 음식으로 팥을 쑤어 죽으로 만들어 먹는데요, 동짓날 먹는 팥죽에 따로 ‘동지팥죽’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중요한 절기 음식이었습니다. 팥 하면 호빵이나 팥빙수가 먼저 떠오르는 저 같은 초등학생 입맛도 하루 정도는 팥죽 한 숟가락 떠야 하는 겁니다. 설탕도 좀 넣어가면서요.
제주 성읍민속마을 옛날팥죽
제주에서도 동지는 민간에서는 물론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동지 때 제주에서는 귤과 유자를 궁궐에 진상했다고 합니다. 그걸 왕이 유생들에게 하사하며 임시 과거인 ‘황감제’를 열기도 했고요. 이거야 원 “귤은 왕이 먹고, 고생은 백성이 한다”는 말이 나올 만한 일이군요.
아무튼 오며가며 팥죽집을 보진 못했던 것 같은데, 이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곳이 있었습니다. 1999년부터 영업을 해 온 옛날팥죽, 그게 가게 이름입니다. 성읍민속마을에 있는 식당인데, 민속마을과 팥죽집이라는 조합이 참 잘 어울리지요.

정겨운 내부
옛날팥죽에서는 매해 한 번 네이버 지도에 공지 사항을 올리는데, 바로 동짓날 공지입니다. 동짓날은 쉬는 날이라도 영업을 하고, 매장 식사는 불가능하며 포장만 가능하다고요. 그러니 가게에 앉아 팥죽 먹는 사람으로 가장 북적이는 날은 언제일까요? 그렇죠, 동지 전날이지요. 제가 옛날팥죽을 찾은 날도 그날이었고요.
제주 초가가 옹기종기 모인 거리에 자동차가 잔뜩 서 있습니다. 렌터카 반, 도민 차 반. 여행 중에도 시절에 맞게 동지팥죽을 챙겨 드시는 여행자들의 정성이 놀랍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미리 주문만 하고 대기 번호를 ‘귀로 듣고’ 나옵니다. 이런 동지 특수에 익숙하신지 음식 주문이 들어오고 나가고,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다 나가고 하는 혼란 속에서도 일 처리가 척척입니다. 기다리던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하다고 인사도 해 주시고요.


단팥죽
옛날팥죽에서 고를 수 있는 메뉴는 의외로 다채롭습니다. 단팥죽이 있고요, 동짓날의 주인공 새알팥죽이 있습니다. 그리고 팥칼국수가 별미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새알팥죽은 2인분부터 주문할 수 있는데요, 원래 자기 나이대로 새알을 넣어 먹어야 한다지만, 이 정도 살았으면 꼬박꼬박 챙겨 먹을 필요는 없지요. 멀쩡한 생일 케이크 초도 한두 개 빼주는 게 이 시대의 올바른 센스인걸요.
단팥죽, 새알팥죽, 팥칼국수 모두 팥의 풍미가 은은하지만 깊게 느껴집니다. 테이블 위에는 소금과 설탕이 놓여 있으니 취향대로 넣어 드시면 되고요. 팥칼국수를 안 먹어 본 분이라면 여기서 꼭 팥칼국수에 도전해 보세요. 기본적으로 단맛이 적고 고소한 팥 국물이라 질리지 않습니다. 콩국수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
시락국밥과 팥칼국수
팥죽이 당기지 않는 분들, 너무 팥만 먹으면 질릴 것 같은 분들은 시락국밥이 딱입니다. 이 시래기국밥이 또 옛날팥죽의 대표 메뉴 아니겠습니까. 구수하면서 얼큰한 끝맛, 딱 적당한 온도로 밥이 말아져 나와서 후루룩후루룩 먹기 좋습니다. 동지니까 팥죽을 챙겨 먹는다는 분들이라면, 이 시락국밥이 더 가슴에 와닿으실지 모르겠어요.
올해 동지는 ‘애동지’라고 음력 11월 10일 이전에 찾아온 동지입니다. 원래 애동지에 아이가 있는 집은 팥죽을 먹지 않고 팥시루떡을 먹는다고 해요. 시절 음식에도 참 다채로운 조건이 붙습니다. 귀신보다 사람이나 환경 변화가 더 무서운 세상, 그래도 동지를 핑계로 달달하고 고소한 팥죽 한 그릇 먹어 든든한 날입니다.

옛날팥죽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민속로 130
10:00~17:00 원래 월요일은 쉽니다.
글 · 사진 | 신태진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날, 동지입니다. 해 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지요. 오늘 밤만 잘 넘기면 하지까지는 해가 길어질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동지를 새로운 시작, ‘작은 설날’이라 부르며 중요한 날로 여겼다고 하네요. 물론 밤이 긴 날인 만큼 요사스러운 기운을 막아줘야 하기도 했고요.
팥은 역병을 퍼트리는 귀신이 가장 무서워하는 음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짓날에는 액막이 음식으로 팥을 쑤어 죽으로 만들어 먹는데요, 동짓날 먹는 팥죽에 따로 ‘동지팥죽’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중요한 절기 음식이었습니다. 팥 하면 호빵이나 팥빙수가 먼저 떠오르는 저 같은 초등학생 입맛도 하루 정도는 팥죽 한 숟가락 떠야 하는 겁니다. 설탕도 좀 넣어가면서요.
제주에서도 동지는 민간에서는 물론 정치적으로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동지 때 제주에서는 귤과 유자를 궁궐에 진상했다고 합니다. 그걸 왕이 유생들에게 하사하며 임시 과거인 ‘황감제’를 열기도 했고요. 이거야 원 “귤은 왕이 먹고, 고생은 백성이 한다”는 말이 나올 만한 일이군요.
아무튼 오며가며 팥죽집을 보진 못했던 것 같은데, 이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곳이 있었습니다. 1999년부터 영업을 해 온 옛날팥죽, 그게 가게 이름입니다. 성읍민속마을에 있는 식당인데, 민속마을과 팥죽집이라는 조합이 참 잘 어울리지요.
옛날팥죽에서는 매해 한 번 네이버 지도에 공지 사항을 올리는데, 바로 동짓날 공지입니다. 동짓날은 쉬는 날이라도 영업을 하고, 매장 식사는 불가능하며 포장만 가능하다고요. 그러니 가게에 앉아 팥죽 먹는 사람으로 가장 북적이는 날은 언제일까요? 그렇죠, 동지 전날이지요. 제가 옛날팥죽을 찾은 날도 그날이었고요.
제주 초가가 옹기종기 모인 거리에 자동차가 잔뜩 서 있습니다. 렌터카 반, 도민 차 반. 여행 중에도 시절에 맞게 동지팥죽을 챙겨 드시는 여행자들의 정성이 놀랍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미리 주문만 하고 대기 번호를 ‘귀로 듣고’ 나옵니다. 이런 동지 특수에 익숙하신지 음식 주문이 들어오고 나가고, 사람들이 떼로 몰려왔다 나가고 하는 혼란 속에서도 일 처리가 척척입니다. 기다리던 손님이 들어올 때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하다고 인사도 해 주시고요.
단팥죽
옛날팥죽에서 고를 수 있는 메뉴는 의외로 다채롭습니다. 단팥죽이 있고요, 동짓날의 주인공 새알팥죽이 있습니다. 그리고 팥칼국수가 별미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새알팥죽은 2인분부터 주문할 수 있는데요, 원래 자기 나이대로 새알을 넣어 먹어야 한다지만, 이 정도 살았으면 꼬박꼬박 챙겨 먹을 필요는 없지요. 멀쩡한 생일 케이크 초도 한두 개 빼주는 게 이 시대의 올바른 센스인걸요.
단팥죽, 새알팥죽, 팥칼국수 모두 팥의 풍미가 은은하지만 깊게 느껴집니다. 테이블 위에는 소금과 설탕이 놓여 있으니 취향대로 넣어 드시면 되고요. 팥칼국수를 안 먹어 본 분이라면 여기서 꼭 팥칼국수에 도전해 보세요. 기본적으로 단맛이 적고 고소한 팥 국물이라 질리지 않습니다. 콩국수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
팥죽이 당기지 않는 분들, 너무 팥만 먹으면 질릴 것 같은 분들은 시락국밥이 딱입니다. 이 시래기국밥이 또 옛날팥죽의 대표 메뉴 아니겠습니까. 구수하면서 얼큰한 끝맛, 딱 적당한 온도로 밥이 말아져 나와서 후루룩후루룩 먹기 좋습니다. 동지니까 팥죽을 챙겨 먹는다는 분들이라면, 이 시락국밥이 더 가슴에 와닿으실지 모르겠어요.
올해 동지는 ‘애동지’라고 음력 11월 10일 이전에 찾아온 동지입니다. 원래 애동지에 아이가 있는 집은 팥죽을 먹지 않고 팥시루떡을 먹는다고 해요. 시절 음식에도 참 다채로운 조건이 붙습니다. 귀신보다 사람이나 환경 변화가 더 무서운 세상, 그래도 동지를 핑계로 달달하고 고소한 팥죽 한 그릇 먹어 든든한 날입니다.
글 · 사진 | 신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