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세상에는 아직 이런 것이 있다 - 허은실 시인 인터뷰 #2

2023-08-12

※ 흰죽을 떠 넣어주는 사람의 마음으로 - 허은실 시인 인터뷰 #1 읽기

 


「이마」,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

이런 게 제가 생각하는 시를 쓰는 태도 혹은 자세인 것 같아요. 화자가 이마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 단순히 내가 아파서라기보다 혼자 이마에 손을 얹고 있는 자세 자체가 나를 울게 한 것이어서일 수 있어요. 이 주제는 〈빨간 책방〉의 오프닝으로 쓴 적도 있는데요. 손바닥의 크기가 이마의 크기가 비슷한 건 그 손으로 아픈 누군가의 이마를 짚어주며 안부를 묻고 곁이 되어주고 그 손으로 때로 흰죽을 떠넣어주라는 뜻은 아닐까 합니다. 시인으로서의 자세, 태도가 무엇일까? 사회적 사건, 참사, 슬픔이 아닌 내면적인 투쟁이나 인간의 본질적인 어떤 것을 다루는 시도 필요해요. 그런데 그건 많은 분들이 하고 계시고 또 젊은 시인들의 감각과 감수성으로 더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지금 더 필요한 목소리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고, 이 시대에 시로써 발언할 수 있는 것, 제가 대변해야 할 목소리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요.

『회복기』 ‘시인의 말’에서 울대 없는 새와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울림을 만들 성대가 없어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존재, 자기 언어가 없어서, 자기 자리가 없어서 자기 발언을 못하는 존재들이 있잖아요. 역사가 소거해 버린 희생자들일 수도 있고,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일 수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너무 작고 적기 때문에 ‘문서가 누락한 이름들’을 불러주는 것이 제 역할이자 태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이름을 부르다

시는 제가 어디로 가겠다는 지향을 정한다고 그대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모르는 채로 끌려가는 부분이 있지만, 시 「배후」처럼 지워진 목소리, 누락된, 기각된 이름들을 일부러 찾아내 불러주는 시인이 되어야겠다는 의식은 놓지 않고 있어요. 시집에 등장하는 에어컨 설치기사의 추락사라든지 첨탑 위의 노동자, 화물노동자라든지. 세월호, 4.3, 5.18, 팔레스타인 문제도 그렇고요.

첫 시집의 첫 시 「저녁의 호명」이 바로 그랬어요. 저녁이라는 시간대가 모든 것을 흐릿하게 지워버리고 결국 암흑 속에 가둬 버리는데, 그때 지워지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시라고 생각했어요. 실제적인 모티브는 팽목항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였는데, 이 태도가 내 시적 과업이 되어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를 가장 앞에 넣었던 거예요. 그 결심의 실천이 가령 『회복기』에 수록된 「배후」 같은 시인 셈인데요. 5.18의 배후가 북한이 아니라 구두 만드는 사람, 칠기 만드는 사람, 고등학생, 석공…들이었다, 이분들은 엄연히 이름이 있었고 끝내 역사의 주체가 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분들의 이름을 찾아내 부르는 것이었지요. 이름을 부르는 게 참 무용한 일이고 떨어지는 꽃잎을 세는 헛된 일인 것 같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생각을 끝까지 지니고 시를 쓰려고 해요.

「개를 끌고 다니는 여자」라는 시가 있어요. 그걸 쓰면서 시 쓰기에 대한 어떤 메타적 인지가 생겼는데요, 그 여자에 대한 기억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잠재돼 있었거든요. 행색도 이상하고 사람들이 다 미쳤다고 하는 ‘그런 여자’에 대한 관심, 그 여자를 대변하는 쓰기가 내 시의 시작이었구나, 앞으로도 그쪽으로 가야 될 것 같다는 자각이 그 시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여자가 언 배추를 씹는 소리와 제가 글씨를 쓰는 소리가 사각사각 오버랩되면서 제가 쓰는 행위는 결국은 이 여자로 대변되는 어떤 존재들을 계속 살려내는 일이겠구나 자각하게 된 거지요.


3467242e3d087.jpg


「회복기 1」,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전략)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
겨우 쓸 수 있을 것 같아
두 마음은 왜 닮은 것인지

무너진 꽃자리
약이 돋는다

비로소 연한 것들의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허은실, 「회복기 1」 중 (『회복기』, 문학동네, 2022)

 

실제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다시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적이 있어요. 저한테 참 묘하게 느껴졌던 순간이기도 한데, 여기서 용서라는 건 어떤 감정을 대변하는 단어일 뿐 글자 그대로 용서의 의미만은 아니에요. 슬픔일 수도 있고 원한일 수도 있고 분노일 수도 있고 자기혐오일 수도 있어요. 분명한 건 누군가를 끊임없이 미워하는 마음으로는 결코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게 저 자신을 향한 마음일 때는 오히려 쓰기에 동력이 되기도 해요. 사람이 아주 밝고 해맑으면 글을 쓸 이유가 없잖아요. 만나서 술 마시고 웃고, 자연을 보며 아름답다고 느끼면 마음이 해소되는데 글을 왜 쓰겠어요. 자기와의 싸움이 있는 사람들은 그걸로 해소가 안 되니까 어떻게든 무언가로 표현해 보려 하는 것 같아요. 그래야 자기가 살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타인을 부정하는 마음이 있으면 좋은 시를 쓸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런 시는 나중에 보면 부끄러워지고, 읽는 분께 좋은 영향을 줄 수 없거나 아무런 울림을 주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걷기를 통해서든 어떤 기도 행위를 통해서든 미워하는 마음, 분노하는 마음이 없어져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더라고요. 사회적, 역사적으로도 그런 것 같은데, 진정한 용서가 있어야 역사가 다음 페이지로 나아가고 사회적 상처로부터 회복되는 일도 가능하잖아요.


bffe2dc09a218.jpg

허은실 시인이 안내한 마을 신당에서

  


「타임라인」, 고통을 그려내는 문장이 아름다워도 되는가

 

고통을 그려내는 문장이 아름다워도 되는가?

- 허은실 「타임라인-bombing:blooming:blooding」의 한 구절 (『회복기』, 문학동네, 2022)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긴 한데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어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이후 폐허가 된 일본에서 소설을 쓰다가 결국 자살을 한 하라 다미키라는 소설가가 있어요. 피폭된 일본의 처참함과 피폭으로 아내를 잃은 슬픔을 정말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는데, 첫 생각은 ‘고통을 그려내는 문장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지’였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고현주 사진작가가 제주 4.3 당시의 유품을 촬영한 작업에 제가 시로 참여해 『기억의 목소리』(문학동네, 2021)라는 책을 냈는데, 이 책을 보신 분들의 반응이 표지부터 사진은 물론 책 자체가 너무 아름답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아름답기 때문에, 그 어지러운 간극 때문에 더 아프게 다가온다는 거지요.

그런 일들이 저에게 질문을 주었습니다. 처참하고 끔찍한 사건을 기록하는 일이 아름다워도 될까-그러나 아름다움이어야 한다, 이런 윤리적인 딜레마가 생겼던 거지요. 처참함이 아름답게 표현되면 자칫 처참함이 소거될 위험도 있지만 결국 예술에서 진실이 아름다움을 통해 전해진다면 나는 어떤 언어로 이 세계의 고통을 표현하고 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예술은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아름다워야 하지만 그 아름다움이 반드시 겉으로 보이는 예쁨은 아니에요. 다만 아름다움이 사람들이 소비하기 좋은, 팔리기 위한 아름다움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어요.


56c4fd36d8fdc.jpg



기억하는 일

과거를 제대로 기억하고 계속 기억해 주는 일이 피해자와 희생자들에겐 너무나 중요한 것 같아요. 기억을 통해 사람은 계속 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 기억이 당사자들에게 너무나 힘겨운 일이겠지만, 저는 당사자가 아니고, 힘들 정도로 많이 기억해 오지도 않았지만, 기억하는 일에 ‘이 정도면 됐어’라는 건 없다는 건 확신해요. 이 세상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고통이 있어요. 저는 작가들이 더 많이 뛰어들어서 더 많이 기억하고 더 많이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치지 않겠습니다, 그런 일에는.


dfaacc2211a1d.jpg


시가 구원이 될 수 있을까?

구원은 못 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점점 시를 더 안 읽기도 하고요.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작은 구원이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북토크라든가, 독자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잖아요. 그럴 때 고백 비슷하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분들이 있어요. 자기 삶에서 어떤 시가 어떻게 왔을 때 정말로 힘이 되었다. 이럴 때 시가 작은 구원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자기 구원이라는 면에서 시가 저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절대적인 구원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지만요. 누구나 상처가 있고, 그 상처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을 왜곡시킨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관계가 힘들어지는 거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상처와의 투쟁이 되고 말지요. 시를 쓰고 난 뒤에야 시를 통해 보이는 게 있어요. 내가 이런 것 때문에 이 모양이었구나, 내 속에 이런 괴물이 있었네, 나에게 이런 상처가 있었네, 비로소 객관화해서 보게 되고요. 그래서 시는 저를 더 나은 사람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가게, 그리고 낫게 해요. 그런 식의 구원은 가능한 것 같아요.

그리고 바람은 그런 거지요. 내가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놓지 않는 한 그 안간힘, 간신히 뭔가를 말하려는 힘이 어디 가지는 않을 것 같다. 그 힘이 누군가에게 닿기를, 울리기를 희망해요. 거기서 메아리 하나가 더 생길지도 모르고, 그리고 그 옆 사람에게도 작은 울림을 줄지 모르고, 그런 희망이 구원이라면 구원일 수 있을 것 같아요.


11fb0c3d34b51.jpg

성산일출봉



「첫눈」, 세상에는 이런 것이 아직 있다

아파서인지 화가 나서인지 혹은 마음이 상해서인지 상처받은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돌아누운 사람이 있는데 그 등뒤에 앉아 오랫동안 기다리다가 흰죽, 미음 한 숟가락 입에 떠 넣어 주는 게 저는 시인이 하는 일인 것 같아요. 그런 행위가 있기 때문에, 아직 이런 것들이 세상에 있다고 말하는 시가 있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은 있는 것 같아요. 부질없는 행위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럼에도 이번 시집의 마지막 시를 흰죽을 떠 넣어주는 사람의 ‘미음의 마음’으로 하게 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848ae3a9d47b8.jpg

아름이와 함께




인터뷰 이주호, 신태진

4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