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다시 목마와 시인을 이야기합니다, 인제 박인환문학관

2025-07-08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주인을 버리고 떠난 목마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가을로 사라져간 목마의 방울소리를 떠올립니다. 잡지 표지처럼 통속적인 인간의 일생, 슬퍼할 것도 없다고 말하고서는, 마치 슬퍼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시인이란 오로지 그런 운명이라고 믿은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처럼 시인 박인환은 지상에 내려 앉아 어색한 생활력으로 뒤뚱뒤뚱 살아갔습니다. 명동 최고 멋쟁이로 명성을 떨쳐도, 당대 최고의 미남으로 선망의 눈길을 끌어도 그는 타고난 슬픔을 어쩌지 못합니다. 막걸리를 마시고, 위스키를 마시고, 전쟁 공포를 떨치지 못해 목숨을 끊은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불안에 자신을 빗대보고, 참담한 인생 어쨌든 낭만을 덧칠해 봅니다. 인생은 오고 가는 것, 그저 통속적인 것, 그래도 낭만은 남아.


박인환 <선시집> / 푸른사상 / 가격 : 15,000원


시가 낭만을 이야기해도 떨칠 수 없는 무력함, 전쟁의 허무. 그러면서도 서정 시인의 책무는 놓지 못하여 폭음에 의지해 삶을 연장해 갑니다. 돈이 모자르면 그 허울 좋은 코트와 재킷을 전당포에 맡깁니다. 일본의 서정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처럼 생활이 시시할수록 시적 서정은 무한하고, 생애 남는 건 시밖에 없습니다. 한 번도 진지하게 세상을 살아가려 하지 않는구나, 인환아, 친구 김수영 시인이 한탄을 합니다, 인환아, 베고니아가 무엇이고 아폴론이 무엇이냐, 실재하는 것, 우리를 애달프게 하는 현실을 써라. 그러나 박인환이란 존재에게 이 불합리한 세상을 견딜 힘은 현실을 직시하고 맞서는 것이 아니라 낭만, 사랑, 취흥이었는지 모릅니다. 


박인환 시인이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운영했다던 종로 파고다 공원 옆 송해길 입구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망우 역사문화 공원에 들릅니다. 1956년 3월 17일 그는 시인 이상을 추모하는 행사를 열며 사흘간 술을 마시고는 3월 20일 밤 9시경 지금 광화문 교보문고 근처에 있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망우동 공동묘지에 안장되지요. 무덤 속 박인환의 품에 안긴 조니 워커 위스키는 지금쯤 어떤 향기를 담고 있을까요. 사람은 가도 시는 향기처럼 남습니다. 


망우 역사문화 공원 박인환 시인의 묘


망우동 묘지에서 다시 차로 두 시간. 박인환이 태어난 인제군에 있는 박인환문학관으로 갑니다. 그는 1926년 8월 15일 인제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제공립보통학교를 다니다 열한 살에 서울로 이사와 정동 덕수공립소학교를 졸업합니다. 열아홉 살에 종로3가에 마리서사라는 책방을 여는데, 마리라는 이름은 프랑스 시인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따 왔다고 합니다. 이때 책방을 드나들던 김수영 시인과 만났다고 하지요. 



박인환문학관이 그가 사랑한 명동에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명동 관광에 필요한 건 길거리 노점과 쇼핑의 낭만이지 시적인 낭만은 아니지요. 문학관으로 들어가는 광장 한가운데 박인환 조형물이 보입니다. 시인을 만나러 달려온 먼 길, 그가 넥타이를 날리며 반갑게 마중을 나옵니다. 2012년 박인환 시인 56주기에 개관했다고 하는데, 안팎으로 관리가 참 잘 되고 있습니다.


문학관 입구로 들어서면 펼쳐지는 1950년대의 명동,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입니다. 그가 운영하던 마리서사도 보이고. 위스키 바, 명동의 살롱들. 박물관식 재현이라도 꼭 보고 싶은 장면이 있습니다. 기대를 품고 계단을 오릅니다. 2층 입구에 대폿집 문이 보이고, 문 안으로 막걸리 한 주전자와 깍두기가 보입니다. 간판에는 경상도집이라 쓰여 있습니다. 배우 최불암 님의 어머니가 운영하시던 주점이라 합니다. 정이 많고 외상을 잘 해 줘서 명동에 진을 치고 살던 작가, 미술가, 음악인들이 매일 밤 들끓었다고 하지요. 어린 최불암은 가게 언저리에서 혼자 놀며 명동의 벨 에포크 시대를 목격했던 거고요.



1956년 봄 박인환 시인은 경상도집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떠나간 사랑에 관한 시를 써내려 갑니다. 사랑은 가고 / 과거는 남는 것 / …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박인환이 만년필을 거두자 신문기자였던 이진섭이 곡이 떠오른다며 즉석에서 곡을 붙입니다. 또 하필 동석하고 있던 사람이 테너 임만섭이라 즉흥으로 공연이 펼쳐집니다. 그날 밤 이후 이 노래는 ‘명동 엘레지’라 불리며 밤이 되면 명동 어디에서나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한 달이 채 못 되어 시인은 세상을 떠난 거지요. 


박인환 시인이 펴낸 책이나 시인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아 명동을 재현하는 선에서 문학관 관람이 끝납니다. 박인환 시인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이 먼 길을 무릅쓸 이유가 적지요. 그래도 혹시 인제를 지나는 길이면 박인환문학관 안에 재현된 마리서사와 경상도집에 앉아 영상 시대에 맥없이 누그러져 버린 오래된 시적 정취를 꺼내보는 일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의 삶도, 감정도 다 통속적인 것. 하루쯤 가물거리던 그 사람 이름을 떠올리고, 시를 찾아 읽고, 노래를 들어본다고 전보다 더 통속적이게 되는 건 아닐 테니까요. 



박인환문학관에서 감성이 차오른 김에 순메밀 100% 국수로 배를 채우는 것도 그럴싸한 일이지요. 올해로 70년 된 국수집 남북면옥은 주문이 들어오면 순메밀을 반죽해 짭짤 시원한 동치미 국물과 함께 냅니다. 국수라지만 냉면으로 분류될 음식입니다. 메밀 그대로의 향기를 느끼다 동치미 국물을 한 모금 마셔 보면 평양냉면에 아직 적응을 못하는 분도 은은하게 퍼지는 메밀향에 이런 게 슴슴한 맛이구나 싶으실 겁니다. 강원도에 왔으니 감자전까지 곁들여 보겠다는 마음과 위장의 여유를 함께 내어 보면 더 좋겠지요.


남북면옥 순 메밀 동치미 물국수 / 가격 : 8,000원




글·사진 | 이주호

브릭스 매거진의 편집장. 『정말 있었던 일이야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지』 『노자가 사는 집』 『무덤 건너뛰기』 『도쿄적 일상』 『오사카에서 길을 묻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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