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제주에서 산 책 #2 - 효돈동 '고요편지'

2024-09-06

제주의 책방을 따라가는 산책은 서귀포시 효돈동으로 이어집니다. 일주동로를 따라 달리면 마을 초입에 커다랗게 “감귤의 발원지 그리고 선비마을”이라고 알려주는 간판이 인상적이지요. 그만큼 감귤 맛있기로 소문이 났지만, 동네 분위기는 여행지라기보다 생활감 가득한 주거지역에 가깝습니다. 그런 점이 효돈동의 매력이고요.


고요편지는 그런 효돈동의 어느 사거리에 있는 책방입니다. 구조가 독특한 건물인데, 안으로 들어서면 ‘고요편지’라는 이름에 걸맞은 분위기가 펼쳐집니다. 차근차근 서가를 둘러보는 동안 고요편지의 한민정 책방지기가 손수 내린 커피로 맞이해 줍니다.


고요편지


Q. 고요편지는 어떤 책방인가요?

고요편지를 설명하는 표어는 두 가지예요. “서로의 고요를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책으로 마주 잡는 연결감을 희망합니다.”

 

‘고요편지’의 ‘고요’가 그냥 조용하다는 뜻은 아니에요. 책방에 오면 온전한 기분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타인에게 자신을 증명할 필요 없이,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안온함을 느끼기를 바랐어요. 그런 고요한 상태에서 책을 만났을 때 그 책과 조금 더 깊은 인연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고요편지가 추구하는 고요가 바로 책과의 인연을 위한 고요함이에요.


고요편지는 이런 곳입니다.

 

책과의 연결점도 그래요. 책 너머에 항상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떤 책을 만난 장소에도 사람이 있었고, 100년 전, 200년 전에 책을 쓴 사람과도 책 안에서 만나죠. 그런데 편지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야기를 잇는 수단이잖아요. ‘편지’라는 말을 통해 책과의 연결점을 나타내고 싶었어요.

 

사실 처음에는 ‘고요’라는 말과 ‘편지’라는 말이 좋아서 책방 이름을 ‘고요편지’로 붙인 건데, 책방을 운영한 지 1년이 조금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의미를 찾고 단단해진 것 같아요. 책방을 운영하는 일이 저한테 잘 맞는다는 걸 알게 돼서 편안해지기도 했고요.

 

그런데 보시다시피 책방이 부동산이랑 이웃하고 있어요. 평소에는 조용하다가 부동산 손님이 오시면 갑자기 어르신들 목소리가 커질 때가 있어요. 조용하던 책방이 갑자기 떠들썩해지면 책방 손님들이 그걸 되게 즐거워하시기도 해요.


고요편지의 서가

 

Q. 이곳 효돈동에 책방을 여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주에 내려오기 전에는 일산에 살고 있었어요. 제가 책방 덕후, 커피 덕후라서 여행을 다닐 때도 항상 로스터리 카페와 책방을 다니고는 했지요. 2019년에 일을 그만두고 제주로 내려왔는데,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생각이었어요. 뭘 하려 하면 할수록 제자리걸음 같기만 하니 아예 하지 말자, 백수로 있자고 다짐했죠. 책방을 할 생각도 없었어요. 책방을 많이 다녀보니 책방 운영이 현실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제주에서는 한두 달씩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지냈어요. 그런데 친구가 함덕에 만춘서점이라는 책방이 있다고, 거기서 한 달 알바를 뽑는다는 거예요. 책방을 하진 않아도 알바는 해보고 싶어서 지원했고, 그렇게 2년 9개월을 만춘서점에서 일하게 됐어요. 그때, 책방 운영 일을 배웠고요.


고요편지의 한민정 책방지기

 

이곳 효돈동은 제주 곳곳을 옮겨 다니다가 도착한 마지막 장소예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효돈동은 여행지라고 하기는 어려워요. 그냥 사람들이 예전부터 계속 살아온 곳이죠. 오래된 동네가 주는 에너지가 좋았어요. 그래서 여기서 그냥 살아봐야겠다, 책방도 자신은 없지만 나중에 나이가 들어서 더 나약해지기 전에 시작해 봐야겠다, 효돈동에서 고요편지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고요편지의 서가에서

 

Q. 책방 운영 시간이 독특합니다. 

밤에 누구든 고독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손님이 오든 안 오든 등대처럼 불을 켜두려고 해요, 그런데 제가 해 질 녘 산책을 좋아해요. 책방을 늦게까지 여니까 산책을 못하더라고요. 계절마다 다르지만 요즘엔 사흘은 저녁 8시나 밤 10시까지 열면서 그 사이, 해가 지는 시간엔 산책 시간을 갖고요, 또 나머지 사흘은 6시 30분까지 열어요. 대신 밤에 오실 분들은 예약을 받아서 그날은 밤까지 여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고요편지의 안쪽 공간

 

Q. 큐레이션은 어떻게 하시나요? 

고요편지에서는 전체적인 장르를 다 다루고 있어요. 쉬운 책도 있고, 조금 어려운 책도 있지요. 이 바쁜 세상에 읽기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저도 책방 여행을 다닐 때 쉬운 책이나 사진이 많은 책, 예쁜 책부터 읽었으니까요. 하지만 짧은 책도 어떤 사람을 적극적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꼭 책 전체가 아니라 제목이라도 읽는 것이 누군가에겐 독서라고 생각하고요.

 

고요편지에서는 ‘반려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요. 고요도 돌보고, 나 자신도 돌보고, 어떤 책도 곁에 두고 오래 돌볼 수 있는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누군가 곁에 두고 읽을 수 있는 책들을 마련하는 게 고요편지의 큐레이션이에요.


고요편지의 서가

 

책은 소설, 시, 에세이, 그림책 장르별로도 놓고 작가별로도 놓아요. 또, 그때그때 주제에 맞게 배치하는 서가도 있고요. 요즘에는 여름이니까 바다에 관한 책을 모아 놓았고, 최근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을 중심으로 슬픔과 가난에 관한 책을 모아두기도 했어요.


테마 서가

 

Q. 역시 제주에 사시는 허은실 시인과 유튜브에서 낭독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계시지요? 

어렸을 때 라디오 키즈이기도 했고, 지금도 팟캐스트를 많이 들어요. 낭독에 관심을 가진 건 일산에 살 때였는데요, 동네 책방에서 매달 은희경 작가가 낭독회를 열었어요. 처음엔 책을 낭독하는 걸 듣는 게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독서의 또 다른 방식으로 저에게 다가왔어요.

 

허은실 시인은 만춘서점에서 서점지원사업을 하면서 만났어요. 서로 낭독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100회 넘게 음성 녹음을 주고받으며 낭독 영상을 만들어 올렸어요. 허은실 시인은 목소리도 낭랑하고 방송인이기도 해서 처음부터 잘 읽었는데, 제 낭독은 되게 오글거리더라고요. 그래도 그냥 좋아서 계속해 나가다 보니까 익숙해졌어요. 지금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를 위해 낭독을 녹음해서 산책할 때 듣기도 해요. 제가 셀카도 안 찍은 사람이지만, 낭독은 조금 달라요. 고요한 상태에서 낭독을 들으면 문장을 받아들이는 게 다르거든요. 오디오북을 들어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내가 읽어서 듣는 게 가장 쉽고 저에게 잘 맞는 방법인 것 같아요.


 

Q. 귤껍질파이북클럽이라는 독서 모임은 어떻게 운영하시나요? 

귤껍질파이북클럽은 둘째 주와 넷째 주 일요일에 꾸준히 하고 있어요. 책방을 열기 전부터 했어요, 책으로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친구의 도움으로 이웃 동네 하례리의 ‘라포르하례’라는 장소에서 시작했어요. 친구가 ‘귤껍질파이북클럽’이라는 모임 이름도 지어줬어요. 책방이 있는 주변 동네는 귤이 아주 맛있거든요.

 

고요편지의 서가에서


이 모임은 신청하는 누구나 책을 어렵지 않게 대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해요. 최근엔 책방 근처 공천포 바닷가를 산책하고 바다를 보며 시집을 읽었어요. 어느 날은 책방에서 소설 읽기를 했는데요. 그것만하면 재미없으니까 떡볶이를 먹으면서 소설 이야기를 나누는 거예요. 변함없이 하고 있는 것은 마음에 남는 문장을 낭독하고 필사한 후 싱잉볼로 고요한 1~2분의 시간을 가지고 마무리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다양한 경험으로 읽기를 감각할 수 있게 시도하고 있어요.


싱잉볼

 

Q. 고요편지를 찾는 분들에게 고요를 선사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혹은 고요를 나누며 책방지기님께 일어난 변화는 무엇인가요? 

최근 아키코 부시의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법』이라는 책을 읽었어요. 프랑스어 중 ‘자르댕 시크레(le jardin secret)’라는 말이 있대요. 직역하면 비밀의 정원인데, 그게 정말 숲이 있고 풀이 있는 정원이 아니라 홀로 자기만의 행위를 할 수 있는 어떤 사적인 공간을 말하는 거예요. 저도 그랬거든요.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1시간씩 그냥 책방에 가서 앉아 있다 오기도 했어요. 거기 가면 행방불명이 되는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선집 『처음 가는 마을』에 수록된 「행방불명의 시간」이라는 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해요. 이렇듯 자기만의, 자기다울 수 있는 스페이스나 리추얼을 갖는 행위를 계속해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고요를 위한 공간

 

그러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공간의 이동이 필요해요. 고요편지가 그런 공간이 되었으면 해요. 그래서 이 장소를 돌보는 제 상태가 고요하고 온전한 상태여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 상태가 누군가한테 전달이 된다고 믿어요. 근본적으로 이곳을 찾는 누군가가 안녕하길 바라요. 물론 소음이 없다고 고요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고요해지라고 누군가에게 강요할 수도 없어요. 대신 이 장소의 뉘앙스, 서가의 책들, 필사된 문장들, 공간에 흐르는 음악이나 향으로써 그 사람에게 쉼이 되었으면 해요.


고요편지로부터

 

이곳은 바닷가도 아니고 올레길도 아니에요. 평생 산 사람들이 오가는 작은 점에 불과하죠. 그런데 고요편지를 굳이 찾아서 온 사람들은 고요를 발견하기 위한 마음이 있는 분들이 아닐까 싶어요. 제가 이 공간을 만들었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을 다 해냈다고 보지는 않아요. 작가들도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어떤 작품을 자기가 다 창작해서 쓴 게 아니라 전해져 오는 어떤 것들을 자기가 받아 쓴 것이라고요. 독서 모임을 함께 시작한 친구, 이곳 페인트칠을 도와준 친구, 가구를 짜준 목수님, 책방에 와서 응원해 주는 손님들이 이 장소를 만든 거예요. 그 마음들을 얻어서 제가 오늘 이 순간을 고요한 상태로 돌볼 힘을 얻는 것 같아요. 그럴 수 있다는 데 감사하고요.


고요를 발견하기 위해

 

Q. 마지막으로 고요편지에서는 어떤 책을 추천해 주시겠어요? 

존 케닉이 쓴 『슬픔에 이름 붙이기』를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우리가 슬픔, 기쁨을 말할 때, 그 단어에 딱 맞는 감정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슬픔도 부정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극도의 충만함’ 같은 감정일 수 있지요. 벅차올라서 슬프도록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고요. 존 케닉은 슬픔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우리의 다양한 감정을 자기가 만든 단어로 정의하고 있어요.


존 케닉의 『슬픔에 이름 붙이기』

 

예를 들어 존 케닉은 ‘산더(sonder)’라는 단어를 만들며 이렇게 이야기해요. 길 가다가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그저 익명의 존재, 엑스트라일 뿐이라고 지나쳐왔는데, 어느 날 문득 그들도 각자의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서 있구나, 라는 깨달음이 이 단어의 뜻이라고요. 처음엔 그도 그냥 단어들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사람들이 실제로 그 인위적인 단어를 쓰기 시작했대요. 언어라는 힘이 참 대단하지요.

 

이 책은 한 번에 읽기보다는 ‘반려책’처럼 언제든 곁에 두고 읽기 좋은 책이에요. 맛있는 사탕을 녹여 먹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여담이지만, 책을 읽다가 나중에야 뒤표지에 제가 좋아하는 김소연 시인과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사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이 책에 더 마음이 가기도 했답니다.


고요편지의 한민정 책방지기


고요편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효돈로 175 1층
https://www.instagram.com/goyoletter.bookshop/




인터뷰·사진 신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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